본문과 떠오른 생각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읜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을 전하질 못하겠다. 친한 사람에게는 들어준다면 기꺼이 말하고 싶다. 사실 듣고 싶지 않아도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것은 어쩐지 어렵다. 복음이 부끄러운 것일까. 고1때부터 꾸준히 가지고 있는 고민이다. 지하철에서 전도하는 건 에티켓이라든가 그런 문제가 있으니 하지 않는게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냥 광장이나 공원, 길거리에서도 전도할 결심이 서지 않는다.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믿음의 문제일까? 내가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임을 더 잘 믿는다면, 사람들이 내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 전할 수 있게 될까? 내가 전하는 복음을 계기로 단 한 사람이라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왜 믿지 못하는 걸까.
일단은 내가 먼저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믿어야 되고,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다. 기도하고 내 주변인에게 먼저 전하고.
말로 하기 어렵다면 삶으로라도 나는 복음을 전해야 하고 또 증거해야 한다.
하지만 내 삶의 모습은 엉망이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다닐 수 있을까? 삶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내 삶부터 복음으로 가득 채워야겠다.
이기적으로 살고, 알면서도 단지 하기 싫어서, 귀찮아서 미루어 버리는 것들. 너무나 많다. 조금만 모른 척하면 안 해도 되니까 그렇게 쉽게 떠넘기는 일들이 많았다. 특히 가족들한테, 집안일 같은 것들.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지금까지 하지 않았고 굳이 하고 싶지도 않은 일들, 그래서 계속 하지 않았던 일들.
한 번에 다 하려고 하면 벌써부터 거부감이 든다. 하기 싫으니까. 그래서 안했던 것들을 갑자기 하고 싶어지는 건 아니니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고 싶은 건 다른 것 같다. 늘 해야 한다고, 그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쉽지않다.
쉬운 것부터, 그래도 덜 싫고 덜 귀찮은 일부터 조금씩 바꾸어 나가야겠다. 당연해질만큼 조금씩 차근차근 바꾸어 나가야겠다.
알고 있잖아. 그게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라는 거.
그러니까 적어도 알면서 하거나 하지 않는 건 그만 두자고. 조금씩이라도.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과제 때문에 읽었던 책이 몇 권 생각나는 부분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신의 존재를 알지만 그럼에도 부인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신의 존재, 하나님의 실존에 대하여 가끔 고민한다. 믿음이 약해서 그런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의심하고 불안해지지만 결론은 항상 같다. 존재한다. 과학적인 이유를 대기는 힘들다. 나는 문과에 과학도 잘 모르기 때문에 과학적인 이유를 댈 수가 없다. 남이 연구하고 찾은 증거들 나는 몇가지에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도 않고 그런 이유로 결론을 내리지도 않는다. 과학적 증거들은 결론을 내리는 동안 사고 과정에서 크게 고려되지 않는다. 지금 얘기하고 싶은 내용에서 벗어나서 이 주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쓸 생각이다. 그때 링크라도 달까. 아무튼.
신의 존재에 대해 내리는 결론은 항상 같다. 신은 존재한다는 결론이다. 그 결론에 대한 내 감정은 수시로 변한다.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두렵고 짜증난다.
(내용이 길어져서 지우거나 다른 글에 쓰려다가 작은 글씨로 남겨 두었다.)
한 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랬다면 나는 좀 더 마음 편하게 살았을 테니까. 그게 더 나은 삶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건 내게 절대적인 명제이기 때문에 부정하는 가정이 생각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가정은 내가 그 사실을 알지 않고 믿지 않는다는 가정뿐이다. 그러니까 지금 가정하고 있는 건 신이 존재하지만 존재함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상황이다.)
적어도 지금 죄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저지르면서도 괜찮았겠지. 뭔가를 할 때 이게 옳은 일일까 잘못된 일일까 고민하는 일도 더 적었을 것이다. 나는 좀 더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가요를 더 많이 듣고 연예인을 좋아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학생 때부터 화장을 했을 지도 모르고 연애도 더 가벼운 마음으로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죽었거나. 실제로 죽을 용기같은 건 없지만 굳이 무의미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면 찾아봤을 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죽을 방법을. 편하게 죽을 방법을.
그럼에도 항상 같은 결론을 내리는 이유는 삶의 경험이다. 기적? 우연? 난 그런 건 잘 모르겠다. 막상 생각해보려고 하면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하나님과 '함께'할 때, 그때 내 삶에 있었던 변화와 그 체험이 나를 끝없이 같은 결론에 이르게 만든다. 물리적인 만남도 아니고, 단순히 감정적인 착각이 아니냐 묻는다면 답할 수 없다. 하지만 내 삶에서 변화의 원동력, 어떤 열정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하나님이 유일했다.
열정이 아예 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는 밤을 새서 웹툰을 본 적도 많았고 요즘에는 게임도 열심히 하고 있다. 부끄러운 영상 편집은 그거 하나 만들겠다고 하루를 바쳤다.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해서 몇 시간씩, 몇 일씩 몰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 내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 살아갈 용기와 힘의 원천.
나는 정말 게을러서, 당장 눈앞의 쾌락에 눈이 멀 때가 많다. 그 쾌락은 소소한 것들이다.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는 것, 웹툰을 밤새 보는 것, 내 책임을 다하지 않고 다른 가족들한테 떠넘겨 버리는 것. 뭐 그런 것들. 소소하지만 중첩되다 보면 다시 책임을 지는 자리로 돌아가기 점점 두려워지는 일들.
하나님 안에 있지 않으면, 자꾸 영적으로 힘을 빼버리면 금새 그런 모습이 되어버린다. 최근에는 물리적으로 어딜 가야 한다거나 시간을 맞춰야 한다거나 할 일이 없어서 더 그런 것 같기는 하다. 뭐든 할 수 있을 듯한 성실함은 머릿속에나 있고 현실의 나는 침대에 누워있게 된다. 신기할 정도로 다시 게을러진다. 제일 자주 하는 현실 도피를 반복하면서.
점점 무거워지는 현실의 무게를 다시 질 용기가 나지 않을 때, 그래서 그냥 현실이 없어지면 좋겠을 때 내게 용기가 되는 것은 역시 하나님이다. 언제나 그랬다.
내게 없는 것들은 너무 많다. 상상 속의 나는 멋진 사람인데 현실의 나는 그렇지 않다. 해야 마땅한 일들, 올바른 형태의 삶. 나와는 거리가 먼 그것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거나, 다가가는 단계에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뿐이었다. 그 단계를 위해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는 동기도 하나님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존재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지금 내가 느낄 수 없다고, 지금 내가 없길 바란다고 부정할 수가 없어서.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는 같은 결론을 내린다.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의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면서도 없기를 바랄 때가 있고, 무슨 상관이냐며 죄를 지을 때가 많다. 마음이 허망하여져서, 미련해져서. 잘못된 걸 알면서도 책임지기 싫으면서도 일을 저지르는 것은 왜일까. 죄에 현혹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평소에 꾸준한 신앙생활을 통해 방비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다. 적어도 알면서 하지는 말아야지. 몰라서도 죄는 짓지 않는 게 좋겠지만.
22절의 경우는 특히나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오랜 기간 종교인으로 살면서 다양한 무신론자들을 보았고 많은 주장과 그 주장에 대한 근거들을 들어봤기 때문이었다. 특히 무신론자인 과학자들을 보면서 나는 하나(과학)만 알고 둘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똑똑하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울 때가 있었다.
무신론자들도 나를 같은 방식으로 보겠지만. 그래도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것이다. 공공연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게 진실이라는 거니까. 나는 내가 믿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라쳐도 아무튼 언젠가는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아마 그 때는 아무도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해서 부정할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꼐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이건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다.
나는 교회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동성애 문제에만 민감하다는 생각을 한다. 많은 죄가 벌어지고 행해지고 있는데 교회가 그 수많은 죄목 중 하나에만 반응하는 건 잘못되었다. 더 많은 죄를 반대하고 내부적으로도 단속해야 한다.
믿는다고 말하면서 죄를, 죄뿐만 아니라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것들도 당연히 반대하고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가 정의의 사도가 된 마냥 우쭐해지는 걸 삼가야 된다. 우리는 다를 바 없는 죄인이었고, 여전히 죄에 쉽게 넘어지는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선민의식 같은 우월감 따위는 혹시라도 느끼면 안된다. (동성애에 대한 부분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그랬던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때리고, 욕하고, 인격적인 모욕감을 줄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 하매 하나님꼐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32) 그들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28절은 이미 많이 말한 내용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던 때가 많았다고. 그건 28절 그대로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서였다. 죄를 짓고 싶으니까. 안된다는 걸 알고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모른 척 하고 싶었다. 하면 안 된다는 사실과, 내게 하면 안 됨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을.
세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 기준으로는 문제될 것 없는 많은 것들이, 하나님을 믿을 때는 문제가 되니까. 하나님은, 성경은 그런 세상이 괜찮다고 하는 일도 죄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죄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많은 순간 나는 차라리 모르기를 바랐고 차라리 없기를 바랐다.
그 일을 하고 싶고, 하고 나서도 아무런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 죄를 짓는다면 당연히 벌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건 두렵고 또 하고 싶지 않았어서. 그래서 나는 많은 순간 스스로의 믿음을 부정하고 싶었고 어쩌면 부정했다. 그렇게 살아왔다.
나는 내 믿음에 대해 회의적이다. 너덜너덜한 내 믿음, 밥먹듯이 뒤집었던 내 입장, 그런 믿음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끊임없이 의심하고 혹시, 어쩌면, 하고 생각하는 나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여전히 희망을 품는다.
내 믿음같은 건 신뢰하지 않는다. 나를 신뢰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거 하나는 믿는다.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인간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하여 죽었으며. 다시 부활했고 뜻하신 바를 '모두 이루었다'는 것을.
내 죄가 정말로 용서받을 수 있을까 여전히 의심스럽다. 여전히 불안하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그 사실을 떠올린다. 나를 위해 죽은 예수님을 떠올린다. 나는 믿을 수 없어도 그 사실은 믿을 수 있고, 내 믿음을 믿을 수 없어도 예수님의 사랑은 믿을 수 있다.
나는 다만 거기에 희망을 건다.
어쩌면 나도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다시 희망을 건다. 나의 삶이 변하리라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하나님은 살아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적용 목표
1) 조금씩 할 수 있는 부분을 하자. 그리고 바꾸자. --> 오늘은 설거지와 해야 하는 과제부터.
2) 약식으로라도 좀 더 진지한 태도로 더 자주 기도하자. --> 자기 전 기도, 그리고 일찍 잠 준비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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